우리밀이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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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의 이 땅 유래는 최소 기원전 2세기 전이다.
평안남도 평양 인근(대동군 미림지) 발견 탄화밀 연도 추정에 따른 것이다.
그럼 실제는 언제부터?
우리나라 밀이 거쳐 온 중국으로 도래가 B.C.3000년경이다.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시기라면 지나친 확장일까?

삼국시대 경북 경주 반월성지, 충남 부여 부소산 백제군량창고 등에서도 탄화밀이 발견되었다. 이는 최소 삼국시대 한반도 전역에서 밀 재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문헌상으로는 1123년(고려 인종)의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우리나라 밀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에는 밀이 적어 상인들이 경동도(중국 지방 이름)에서 사온다. 그러므로 면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이를 근거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밀은 참 귀한 존재였다는 인식이 지배해 왔다.
그렇지만 주목할 점, 서긍은 오늘날 세계 밀 생산1위국 중국의 최대 밀 주산지이자, 밀을 제1의 주식으로 하는 화북지방 출신이란 점이다.
지천이 밀로 둘러싸인 곳에서 온 외지인 눈에 고려의 밀, 그 양이 제법이라도 눈에 들 리가 없었을 터이다.

당시 밭 농업 비중도 상당했을 터, 요소요소에서 밀은 잘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거래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 그 밀이 어디로 집산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상당규모여도 개별 가정 단위, 마을단위 소비가 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추론의 근거는 바로 1910년 우리나라 밀 재배 통계이다.
1910년 우리나라 밀 생산량이 자그마치 91,624톤, 지금의 3배였다.
인구는 지금의 1/3 (17,000,000여만 명), 인구대비로 오늘날 300,000톤에 이르는 양이다.
재배면적 기준에서는 129,173ha, 지금의 13배 이상이다.

그래서 고려시대 밀 넘쳐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희귀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수정할 필요이다.
최근 일본 밀 학자가 우리나라 제분기업을 논하면서 “국내 밀 생산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는 ...”의 표현을 쓰는 것을 봤다.
그런 시야에서 서긍도 고려의 밀을 접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 조선시대 밀이 귀했다는 것은 수입밀로 밥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금까지 수입밀에 빌붙어 온 우리나라 천민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일 수 있다.

조선시대 밀 관련 문헌 기록은 다양하다.
세종 조의 농사직설 외 다수 조선시대 농서에서 밀 재배법을 소개한다.
한의학서 동의보감, 요리책 음식디미방 등에도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산량이 더욱 늘어난다.
우리나라 쌀을 수탈해 가는 대신 밀ㆍ보리 생산을 늘린 일제 강점책 영향이 있었다.
1939년 336,361톤까지 증가한다.

이 소중한 우리 농작물, 우리 먹을거리 밀
해방이후 시련기를 맞는다.

미군정에 의한 미국 밀 도입, 1956년 이후 PL480에 의한 미국밀 무상원조, 수입밀 기반 과도한 제분시설 증축과 혼ㆍ분식 장려운동 속에 이 땅 농작물로써 밀의 지위가 급격히 상실해 간다.
마침내 느리게나마 성장해 오던 밀 생산이 1970년 이후 급격한 하락으로 접어든다.
해방 후 꾸준한 증가 속에 1970년 대 전후 시기 1인 연간 30kg까지 밀 소비가 늘었지만 우리나라 밀과 인연은 점차 멀어져 갔다.

상업농 진전이 밭밀 재배를 크게 위축시켜 갔다.
논 이모작 밀도 통일벼 개발로 모내기 시기가 당겨지면서 존립이 위태해져 간다.
WTO체제 출범을 부른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이 농산물 수입을 급속도로 늘려갔다.
이 흐름에서 정책당국은 1984년 밀 수매 중단을 발표한다.

생산 후 판로가 막힌 밀.
급기야 1991년 551톤까지 추락, 1991년 국내 밀 연구의 마지막 보루 농촌진흥청 맥류연구소마저 폐지된다.

제2의 주식으로 자리한 밀.
이 밀을 쥐도 먹지 않고, 바구미도 살지 않는 수입밀에 맡겨둘 수 없다는 자성. 그리고 우리 농업ㆍ농촌, 식량자립, 농촌문화계승, 공동체 복원을 위해 국민이 직접 나서게 된다.

우리밀살리기운동의 태동이다.
1987년 경남 합천에서 막걸리용 누룩을 위해 길러오던 밀로 종자를 확보해 재배를 늘렸다.
1988년 한살림과 가톨릭농민회가 우리밀살리기운동에 의지 모았고,
1989년 경남 고성 두호마을에서 본격 생산을 늘려 전국으로 파종을 확대해 갔다.
그 힘을 모아 1991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가 발족한다.

국민의 큰 성원 속에 우리밀살리기운동으로 밀은 다시 밥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민간의 자발적 운동으로 밀은 살렸지만, 산업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벅찬 일.
열악한 품종, 제분ㆍ가공시설 미비, 경영능력 미숙 여기에 IMF경제위기까지 겹치면서 우리밀살리기운동 사업부분이 부도를 맞는다.

안전ㆍ안심 먹을거리 우리밀은 계속 살려야하겠기에 그간 종사자들 중심으로 우리밀 사업을 새롭게 이어간다.
품질고급화, 제품다양화, 재배안정화에 힘을 쏟으며 계속해서 사업을 이어간다.

그 고집과 인내가 있어 2007/08년 국제곡물가격 폭등 시기 제2의 녹색혁명을 통한 국산밀 산업의 새로운 모색을 가능케 했다.

그렇지만 새롭게 정책은 섰지만 그 길이 순탄치 못하다.
정책당국의 2015년 10% 자급 선언에도 불구하고, 2016년 밀 자급은 1.8%에 그쳤다.